처음 청명을 시작하며 편집장님이 현실의 자아와 영화를 감상할 때의 자아를 분리해 영화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닉네임을 정하자고 제안했는데요. 그 제안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 바로 '키키'였습니다. 키키는 용감하고 의존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강인한 여성 주인공입니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키키를 비롯한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에게는 친구나 조력자가 필요할 수 있으나, 구원자는 절대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출처: 도에이
저도 키키처럼 의연하게 또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에 닉네임을 정하게 됐습니다. ‘가끔 우울하기도 하지만, 나는 괜찮습니다’라는 키키의 말처럼 종종 우울하고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입추가 지나자 신기하게 밤공기가 조금은 선선해진 것 같아요. 저는 입추보다는 처서에 가을이 왔음을 더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는데요.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가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처럼 여름이 가고 가을이 드는 계절의 순행을 드러내는 절기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처서는 24개의 절기 중 14번째에 위치하는, 가을을 넘어가는 절기입니다. 입추와 백로 사이에 위치해 8월 23일 무렵에 드는 절기인데요. 앞서 이야기했듯 여름이 자니면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저는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겨울을 데려오는 가을을 미워하곤 했는데요. 겨울을 버티기 위해서, 가을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꼭꼭 되새기곤 했습니다. 은행잎이 떨어지는 걸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나 가을밤의 선선함을 만끽하며 걷는 시간들. 예쁜 단풍잎을 주워 코팅해 만든 책갈피를 주변 사람에게 나눠주면서요.
요즘은 점점 짧아지는 가을을 생각하며 처서의 순간을 언제까지 즐길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온전히 가을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만추>입니다.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탕웨이와 김태용 감독의 사랑이 시작된 작품이기도 하죠. 영화를 다시 볼 때면 영화 속의 애나(탕웨이)와 훈(현빈)의 애틋한 사랑만큼이나 현실의 사랑까지 곱씹게 됩니다.
출처: CJ엔터테인먼트
애나는남편을살해한죄로교도소에7년째수감중입니다. 갑작스러운어머니의죽음으로인해3일간의휴가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애틀로 향하는데요. 도망치듯 버스에 탄 훈은 애나에게 차비를 빌리고, 자신의 시계를 담보로 건네줍니다. 집에 들어온 애나는 변한 고향의 모습과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만큼 사랑했던 사람의 결혼을 직면하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습니다. 이로 인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리로 나갑니다.
출처: CJ엔터테인먼트
우연히 다시 마주친 훈과 애나는 놀이동산에 가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나눕니다. 애나가 수감된 사연까지 자연스레 이야기하게 되지만, 30분만 기다려달라는 훈의 부탁을 무시하고 훈의 시계만을 둔 채 애나는 떠납니다.
이후 훈은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애나가 곤란하지 않도록 눈치껏 행동하나, 애나가 감옥에 가게된 원인인 왕징(김준성)이 애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간섭하는 것을 보며 왕징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애나는 왕징에게 왜 그랬냐며 훈이 폭력을 휘두른 핑계인 ‘포크’를 이용해 훈과 자신에게 울부짖으며 사과하라고 외칩니다.
7년이 지난 늦은 사과를 받게된 애나는 지정된 기한인 3일째 교도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합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버스는 잠시 정차하는데요. 훈은 애나를 만나기 이전의 삶으로 인해 살인 누명을 쓰고 둘은 출소 후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고 헤어집니다. 2년 후 출소한 애나는 훈과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출처: CJ엔터테인먼트
명확한 결론이 아니라 열린 결말이기에 하릴없이 둘의 만남과 사랑을 짐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영화 내내 자욱한 안개가 껴있는 것처럼 결론도 안개가 흩뿌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나가 받는 어색한 용서와 7년의 시간동안 품어온 애증의 마음을 함부로 짐작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가을의 끝이 시린 겨울일지, 겨울까지 지나고 난 봄일지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여름까지 애나가 걸어갈 길을 응원해야겠습니다.
만추(晩秋)는 늦은 가을이라는 뜻이지만, 어쩐지 저는 만추(滿秋). 가을이 가득 차있다는 뜻으로 오역하게 됩니다. ‘우리 다시 만날까요? 당신이 나오는 그날에’ 훈의 대사처럼 가을이 오는 그날이면 떠오르는 영화 <만추>와 함께 가을을 조금 더 사랑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