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12명의 에디터들의 영화 이야기가 잘 전달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12개의 절기를 지나오며 청명 여름 가을 호 잡지발간 준비와 몇 개의 시험, 그리고 몇 개의 크고 작은 도전들을 마무리했습니다. 님은 어떤 계절에, 어떤 일들로 채워나가셨나요?
첫 무비레터를 보내드렸을 때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소만이었는데, 어느덧 첫 눈을 준비하는 절기가 훌쩍 다가와버렸습니다. 오늘은 소설, 24절기 중 20번째 절기입니다.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하여 소설이라고 하는데 벌써 첫 눈을 맞아버렸네요. 절기를 세며 계절을 보내면 시간의 흐름이 조금은 촘촘해지는 것 같아 계절을 조금 더 길게 만끽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첫 눈도 맞고, 추위도 조금씩 다가오자 연말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님께서는 연말에 어떤 생각을 자주 하시나요? 저는 연말에는 연초를 많이 떠올립니다. 올 한해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어떤 다짐들을 갖고 시작했었는지, 어떤 일들을 계획했는지 등 저의 생각들을 찬찬히 돌아보곤 해요. 생각해보니 저는 새로운 시작에 유난히 설레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미묘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가 떠올랐습니다.
출처: 센트럴 파크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는 단편 독립영화로, 주연배우는 이 영화의 감독 정가영 감독뿐입니다. 정감독은 어느날, 친구와 전화를 하며 문득 조인성을 자신의 차기작에 캐스팅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분의 짧은 러닝 타임동안 처음엔 장난스럽게 말했던 조인성 캐스팅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무작정 이곳 저곳에 전화를 걸기 시작합니다. 조인성 캐스팅 계획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가져와라'처럼 현실적인 조건들부터 먼저 따지기 시작합니다. 난데 없이 왜 조인성을 캐스팅하냐는 미지근한 주위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정감독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인들의 회의적인 태도에 정감독이 자주 내뱉은 말은
“나는 조인성 캐스팅하면 안돼? 나는 조인성 좋아하면 안돼?”
였습니다. 독립영화 감독이 조인성같은 톱 배우를 캐스팅 못할 이유도 없고, 이런 선택에 대해 그 누구도 손가락질할 이유가 없다는 당찬 포부를 담은 말이었습니다. 시나리오가 준비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화를 찍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도전을 멈출 이유는 없었습니다. 일단, 부딪혀 보는 정감독의 모습에서 올해 초 뭐든 부딪히며 배워가던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출처: 센트럴 파크
올해 초 저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한 활동이 참 많았습니다. 주위에서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준비되지 않은채 저지른 일도 있었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미숙한 상태로 진행하다보니 걸림돌도 많았고, 혼자 밤을 지새우며 머리를 굴리던 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탱해준 것은 결국 '좋아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시켜서 한 일이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일도 많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굳건히 버텨주고 있으니 일을 끝까지 마쳐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완벽한 준비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해도 막을 수 없는 변수들이 자꾸만 생깁니다. 그런 변수들을 사전에 일일이 모두 신경쓰며 도전을 미루기에는 시간만 지체될 뿐입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도전의 이유는 충분하다고 전하는 이 영화가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됐습니다.
정감독은 조인성과 전화통화를 하다가도 꿈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벌러덩 누워버리기도 합니다. 한 해에 끝이 다가오는 요즘, 저는 타인에 비해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어 침대에 누워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올해 초의 뜨거웠던 열정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설레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 한달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소설이 가져운 차가운 날씨에도 무언가를 뜨겁게 좋아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려본다면, 겨울이 주는 무기력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님에게도 마음속 불씨가 다시 훈훈히 내면을 데우길 바라며, 무비레터를 마칩니다.